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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
저자 : 유인선
출판사 : 창비
출판년 : 2012
ISBN : 9788936413323

책소개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총 3부로 구성하여, 베트남 북속시기의 역사적 전개부터 독립왕조시기의 양국관계, 현대 양국 관계의 양면성을 살펴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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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2700년 전 베트남 건국부터 오늘날까지 베트남-중국관계의 역사와 전망을 집대성한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은 유인선 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그간의 학술성과를 집약한 국내에 희귀한 베트남 연구서이다. 건국기부터 중국과 영향을 주고받은 베트남인들이 중국 역대 왕조와 현 베이징정부의 정치적 위협과 침략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해왔는지를 방대한 관련사료와 기존 연구를 분석하며 세밀히 재구성하였다. 서구에서 이루어진 기존 양국관계 연구가 거의 중국의 관점에서 대외정책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다룬 데 비해,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중국관계를 다룬 것은 이 책의 특장이자 그간의 베트남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점이다.

지리적으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자리하지만 한국과는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며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 한국 다음으로 크게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나라이다. 역사와 문화의 중심을 북부에 두고 성립하여 대대로 남진(南進)정책을 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북쪽 국경을 맞댄 중국의 끊임없는 지배와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베트남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통한 우호선린관계와 침략에 대한 단호한 저항정책을 함께 구사하며 독자적 생존을 모색해왔다. 이 책은 베트남역사 전시기에 걸쳐 대중(對中)관계는 양면성을 가지고 이루어져왔으며, 그 바탕에는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대등(對等)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근대시기 내내 베트남은 실리와 국가적 자존심을 동시에 보전하는 전략을 활용했으며, 이는 현대의 베트남도 마찬가지이다. 냉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자국의 생존과 공영을 모색해온 베트남역사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 속에 동북아시아 평화의 균형자로서 생존을 모색해야 할 한반도에 시사하는 바 크다.



책은 전체 3부로, 북속(北屬)시기, 독립왕조시기, 청불전쟁(1884∼85) 이후 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구성된다. 1부는 베트남 역사의 기원부터 자리한 중국과의 관계의 역사를 점검한다. 15세기말 편찬된 베트남 정사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는 베트남의 기원을 중국 삼황시대 신농씨까지 소급하고 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문화적으로 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의 발로로, 건국기부터 중국관계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베트남역사 초기 대중관계에서 베트남의 독립성과 베트남문화의 독자성을 앞세운 인물은 조타(趙?, 베트남어로는 찌에우 다Tri? đ)이다. 중국관리 출신 조타는 남중국에서 북베트남에 이르는 지역에 독립왕조를 건설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으며, 베트남이 중국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한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필요에 따라 신하의 예를 약속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황제를 칭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중국의 베트남 침략과 지배는 한(漢)-삼국시대 오(吳)-수(隋)-당(唐)을 이어 계속되었지만 그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후한 광무제 치하 중국관리의 폭거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킨 쯩 짝(Trung Trac, 徵側), 쯩 니(Trung Nhi, 徵貳) 자매를 비롯해, 중국 왕조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541년 리 본(Ly Bon, 李賁 또는 리 비Ly Bi)의 독립투쟁이 이어졌다. 긴 세월 중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은 966년 딘 보 린(Dinh Bo Linh, 丁部領)이 제위에 오름으로써였다. 조타에서 시작된 찌에우 다의 전통이 회복된 것이다.



2부는 독립왕조시기의 중국관계를 다룬다. 독립국가로서 베트남의 딘 보 린은 중국대륙에서 세력을 키우던 송(宋)과 친선관계를 맺고자 했다. 송은 딘 보 린을 군왕(郡王)에 봉하여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딘 보 린은 송에 사신을 보낼 때 아들의 이름을 빌리는 등 황제의 권위를 잃지 않고 독립국의 위신을 지키려 했다. 송 이후 들어선 명은 베트남에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다수의 문화기관을 설립했다. 중국식 예의범절을 보급하고 베트남 고유의 관습을 금지하여 남녀 모두에게 단발을 금하고 여성에게는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短衣長裙]를 강요했다. 중국식 학교제도를 도입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이후 명의 베트남 지배에 조력자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각도의 강제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동화는 명의 의도대로 시행되지 않아서 오래도록 상례(喪禮)는 베트남 관습대로 치러졌다. 명 이후 들어선 청대에는 윈난(雲南) 변경의 영유권 다툼과 중국인 불법이주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청의 건륭제가 출병을 결정하자 응우옌 반 후에(Nguyen Van Hue, 阮文惠) 황제는 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중국과 베트남은 다른 인종이고 별개의 나라임을 천명한 그의 포고문은 베트남인들이 중국 침략의 부당함을 대를 이어 잊지 않고 있으며 그에 저항해온 전통을 명예롭게 계승하려 함을 보여준다. 응우옌 반 후에가 청군을 격파하자 건륭제는 베트남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후 양국은 청조 말기의 혼란상과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 및 식민지화(1858년 다 낭 공격, 1859년 자 딘 성 점령, 1862년 동부 3성 공략, 1862년 6월 제1차 싸이공조약에 따른 동부 3성 프랑스 점령, 1867년 서부 3성 점령)과정에서 미온적인 관계를 맺는다. 베트남의 요청으로 청은 프랑스군을 물리치려 베트남에 출병하지만 1883년 베트남이 프랑스의 완전한 보호국이 됨으로써 청의 영향력은 무력화되기에 이른다. 비록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그전까지 응우옌왕조가 청에 보인 문화적 자긍심은 베트남이 여러 주변 제국들에 대해 독자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은 대국의 위신을 과시하여 ‘대남(大南)’을 황제의 옥새에 새겼으며 주변 국가들을 중국적 화이(華夷) 개념으로 대하였다. 이러한 ‘대남제국 질서’는 중화적 세계질서에 비하면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베트남인들이 독자적 세계질서 형성에 기울인 노력을 입증한다.



3부에서는 프랑스 지배기, 2차대전기,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 중월전쟁을 중심으로 베트남과 중국관계를 살펴본다. 청은 베트남을 두고 전쟁을 불사할 만큼 프랑스에 맞섰지만 결국 프랑스의 지배력을 인정하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지배에 저항하는 근왕(勤王)운동세력과 엇갈리며 장차의 민족운동세력이 싹텄다. 대개의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자의 언어를 통해 서구적 근대화를 접한 것과 달리, 베트남 민족운동은 중국의 ‘신서(新書)’를 통해 근대적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는다. 유교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가 중국을 통해 근대사상을 흡수한 것이다. 초기 베트남 민족주의운동의 주역 판 보이 쩌우(Phan Boi Chau, 潘佩珠)는 량 치차오(梁啓超) 등과의 교유를 통해 특히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이들 민족주의자는 중국 광저우(廣州)를 본거지로 활동했고, 응우옌 아이 꾸옥(Nguyen Ai Quoc, 阮愛國), 곧 후일의 호찌민(Ho Chi Minh, 胡志明)이 활동을 시작한 곳도 여기다.

끈질긴 독립운동 속에 1954년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베트남은 싸이공정부와 호찌민의 하노이정부로 양분되었다. 하노이정부는 중국의 강력한 지원 속에 미국의 비호를 받아 베트남전을 수행했으나 중국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부침을 거듭했다. 통킹 만 석유탐사를 비롯해 파라셀군도를 둘러싼 분쟁은 양국관계의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았다. 중국-베트남의 육상 국경에서도 사소한 무력충돌이 계속되었는데, 1975년 명실상부한 통일베트남을 건설한 하노이정부가 중국의 원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20년 가까운 ‘대미항전’에서 1975년 하노이정부가 승리한 것은 미제국주의 최대의 실패일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영토확장을 추구한 중국의 대국패권주의의 실패이기도 했다. 중국의 남진과 동남아에서의 세력권 확대기도는 베트남과 크게 부딪혀 마침내 1979년 2월 중국군의 대대적인 베트남침공이 개시된다. 전쟁은 16일 만에 끝났지만 냉전체제하 사회주의권 내부의 침략전쟁은 전세계를 동요시킨 일대사건이었다. 장기간의 협상과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가 선언되고도 1991년 11월에야 베트남 당서기장과 수상의 베이징 방문으로 공식적인 양국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때 발표된 공동성명은 베트남으로서는 다시는 중국세력권에 편집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중국으로서는 1950년대 같은 형제국 관계는 없다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공식적인 관계정상화는 베트남에 국경지방 정비를 통한 경제성장의 기회를 부여했으나, 해양의 국경분쟁은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베트남은 싫든 좋든 중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공생을 모색해야 하는 나라이다. 천년의 중국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고, 프랑스·미국과의 전쟁 속에서도 협력과 갈등을 거듭하며 중국과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베트남인들은 뿌리깊은 대등의식을 바탕으로 대중관계를 조율해왔다. 혁명기 호찌민과 하노이정부는 중국의 희생적 원조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마오의 사상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호찌민이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을 때 이는 미국과의 전쟁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위기와 경계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중관계에 임하는 베트남의 자세는 영토분쟁으로 소란한 동북아의 한가운데에 처한 우리가 주목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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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서양동양학술총서 간행사|21세기에 다시 쓴 간행사
책머리에

서장

제1부 베트남 북속시기의 역사적 전개: 지배와 항쟁
제1장 베트남역사와 중국
제2장 중국에 대한 저항의 발단
제3장 중국 지배형태의 변화
제4장 독립의지의 표출
제5장 독립의 길

제2부 독립왕조시기의 양국관계: 조공과 방교
제1장 독립왕조의 성립과 중국과의 관계
제2장 리ㆍ쩐 왕조와 송ㆍ원
제3장 명의 베트남 지배
제4장 레 왕조 전기 및 막씨 정권과 명
제5장 레 왕조 후기 및 떠이 썬 정권과 명ㆍ청
제6장 응우옌 왕조의 성립과 청

제3부 현대 양국관계의 양면성: 우호와 갈등
제1장 프랑스 지배기의 베트남과 중국
제2장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양국관계
제3장 인도차이나전쟁과 중국
제4장 베트남전쟁 발발과 중국

결어: 요약과 과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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