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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도쿄
메이지의 도쿄
저자 : 호즈미 가즈오
출판사 : 논형
출판년 : 2019
ISBN : 9788963572116

책소개

오늘의 도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문명개화를 발빠르게 선택한 일본.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메이지 45년의 기간에 거대 도시 도쿄가 탄생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전통과 근대 문화가 혼재하며 급격한 변화를 이루는 근대문명의 공간이자 새로운 문화를 즐기는 용광로였다.

문명개화의 중심지, 메이지의 도쿄
천하를 군림하던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세상은 한 순간에 정권교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선진 서구제국을 따라잡기 위해 ‘서구화정책’을 내걸고 일본의 제도와 관습의 서구화를 도모한 것이다.
근대국가의 건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한다. 메이지 도쿄는 270년간 번영해온 에도의 도쿄를 온전히 물려받아 1868년부터 1912년에 이르는 메이지 45년 동안 도쿄는 급속히 발전하고 변화한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문명개화

메이지는 1868년에 시작되었다.
천하를 군림하고 있던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무너지고 세상은 한순간에 정권교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일본의 역사 속에서도 최대라고 할 만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이 에도에서 메이지로 옮겨가며, ‘왕정복고’의 구호 아래 쇼군대신 천황이 직접 정치를 하는 메이지 신정부가 탄생했다.
신정부는 우선 ‘서구화정책’을 내걸고 서구의 기술과 문화를 섭취하고 동화하는 일에 착수한다. 근대국가건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온 나라가 결속하여 쏟는 열정과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문화의 중심은 도쿄다. 도쿄는 도쿠가와 쇼군이 거주하는 곳으로 약 270년간 번성해 온 에도의 도시를 온전히 물려받은 수도다. 동란으로 황폐해졌다고는 하지만 메이지의 일본인은 처음으로 꿈꾼 문명개화의 중심지이며 모델도시였다.

새나라 만들기

페리(Perry) 제독이 쇼군에게 기차모형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메이지 2년에 일본은 철도건설안을 확정하였다.
철도건설은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개명파 관료가 추진한 일대 국가적 사업이었다. 산업운송은 물론 근대적인 교통과 통신을 정비하는 것은 당면한 과제였다. 철도 없이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명개화의 실적을 직접 실감하게 하려면 철도가 제일 빠른 길이었다.
기차는 신바시~요코하마 구간 29km를 53분에 달렸다. 당시의 사람들은 기차를 ‘육증기陸蒸氣’라고 부르고 신기하게 여기며,
‘사랑의 무거운 짐을 기차에 싣고 가슴으로 불을 지피는 육증기’
라고 노래했다.
승객이 주의해야 할 사항으로 ‘흡연기차 이외에는 담배를 허락하지 않음’이라는 경고문을 부착했다. 요금은 상등은 1엔 50전, 중등 1엔, 하등 50전이었는데 쌀 10kg에 36전하던 시절에는 제법 비싼 편이었다.

도시의 시설

메이지 5년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는 월급 1개월분이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메이지 9년(1876)에는 요일제도 정해졌다. 메이지 직전부터 ‘16돈타쿠(네덜란드어 zondag)’라고 해서 10일 중 1일과 6일, 이틀이 휴일이었는데 이제는 일요일이 휴일이고 토요일은 오전에만 일을 하게 되었다.
태양력 채용과 함께 시간제도 바뀌어, 하루를 24시간으로 하는 정시법을 시행하게 된다. 시각을 알리는 또 하나의 시설이 시계대다. 시계대라든가 시계탑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로맨틱한 느낌이 드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유행이다.
각 가정에도 시계가 보급되었다. 팔시계라고도 불리는 회중시계는 상류 신사들의 상징이었다. 긴 은사슬을 달고 일본옷의 허리띠에 매달아 늘어뜨리거나 옷깃에 걸거나 한 것 같은데, 뭐니 뭐니해도 양복 조끼 주머니에 넣고 사슬을 늘어뜨린 모습이 가장 멋쟁이 스타일이었다.

언론의 시대

에도의 출판물은 한서漢書와 요미혼?本 등을 판매하는 서적 도매상이나 에조시?草紙 등 대중잡지 도매상에서 간행되었다. 발행소가 서점을 겸하고 있었다. 출판문화의 중심지 도쿄에 출판사가 집중적으로 급증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시작으로 수많은 정치와 계몽서가 발행되어 신시대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에 부흥하게 되었다. 책의 형태도 전통식 제본에서 서양식으로 바뀌었고, 목판인쇄에서 활자 인쇄가 일반화되었다.
일본 최초의 일간지는 메이지 32년(1871)의 이다. 납활자를 사용한 활판인쇄도 이 신문이 최초라고 한다. 도쿄에서의 일간신문의 효시는 메이지 5년의 이고, 이를 전후해서 참의參議 기도 다카요시木?孝允의 입김이 실린 , 영국인 블랙Black이 창간한 , 철도와 체신청 공용의 , 등이 잇달아 발행되었다. 메이지 10년경에는 도쿄 니치니치東京日日, 호치報知, 아사노朝野, 마이니치?日, 아케보노曙가 5대 신문으로서 서로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거리에서 각 신문사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겉옷을 입은 신문판매원이 방울을 울리며 큰 소리로 신문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신문사도 긴자거리에 위풍당당한 서양식 사옥을 마련하였다. 신문기자도 새로운 직업으로 시대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도쿄의 도시 만들기

수상운송의 도시로 일컬어진 에도의 하천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많이 가설되었다. 이전의 다리는 모두 배의 통행을 위해 중앙이 볼록하게 올라간 목조다리였는데 메이지가 되자, 마차 교통을 위하여 평평한 형식으로 다시 가설되었다. 수상운송에서 육상운송으로 교통 수송시스템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집과 상점이 늘어선 거리와 건물 모습의 변화와 함께 도시의 이미지를 바꾼 것이 있다면 목조다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석교의 출현이다.
이어서 철교시대가 찾아왔다. 스미다가와 강뿐만 아니라 시내 여기저기의 다리도 철골화가 진행되어, 에도 이후의 수변 경관은 점차로 변모해갔다.
가이운바시海運橋 옆의 미쓰이하우스三井ハウス는 제일국립은행이 되었는데, 그 은행장은 가부토쵸兜町 일대에 근대적인 비즈니스센터를 조성하려고 한 인물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榮一(1840~1931)다. 시부사와는 원래 막부신하에서 대장성 관료가 되었다가 은행가와 실업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중심가는 주식거래소, 은행집회소, 도쿄상법회의소 등의 각종 경제기구를 비롯해 민영기업과 경제 저널리즘이 집중되어 근대산업을 견인하는 장소였다.

시민의 생활

서민은 주로 시타마치下町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시타마치의 모습은 에도시대와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큰길가에는 도죠즈쿠리土?造り의 상점이 처마를 맞대고 들어서 있었고 서양식 건축이 듬성듬성 눈길을 끌게 되었지만 그 뒤쪽에는 여전히 나가야長屋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가야도 변함없이 좁은 골목길에 칸막이로 6~8채로 분할한 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현관과 부엌문을 같이 쓰고, 좌식 설거지대와 부뚜막 그리고 흙으로 빚은 풍로가 놓이고 천장에는 연기를 뽑아내기 위한 배출창이 있었다. 거실은 다다미 4장 반 크기(약 7.4평방미터) 정도가 보통이다.
골목길은 집밖에 풍로를 내놓고 생선을 굽거나 나팔꽃 화분을 장식해 생활과 사교의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가야에 정착한 사람은 주로 장인과 점원, 공장노동자 등이며, 조그만 장사를 경영하는 가게도 있었다. 생활은 결코 안락한 편이 아니었다. 나가야에 사는 아이들은 아이를 돌보거나 견습 점원, 여공이나 기생으로 일해야만 했다. 부인들은 버선 바느질, 나막신下? 끈 만드는 바느질, 일본 옷 만들기와 옷을 뜯어 빨아서 말리는 일 등의 수공 부업으로 어려운 생활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타마치下町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독특한 기질과 인정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먼 친척보다도 가까운 이웃’이라는 시타마치 전통의 근린의식은 그 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도시의 즐거움

1815년경 프랑스에서 자전거가 발명되었다. 일본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메이지 3년(1870)경이라고 한다. 메이지 10년대가 되면 각지에 자전거를 임대 영업하는 곳이 생겨났다.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세발자전거를 1시간에 2전에 빌려주어 꽤 장사가 잘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전거 보급이 본격화 된 것은 메이지 30년(1897)대부터다. 이 무렵 유행하던 노래에 이런 것이 있다.

‘따르릉 따르릉하며 달리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자전거 곡예를 잘하는
건방지게 양손을 놓은 멋쟁이 남자
저쪽으로 가면 위험해요.
이쪽으로 오면 위험해요.
아~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이에, 거봐 넘어졌잖아’

이렇게 타는 즐거움으로 시작한 자전거는 마침내 편리함과 실용성을 인정받게 되어 단골집으로 주문을 받으러 돌거나, 짐받이에 상품을 싣고 배달을 가는 데 사용하게 되었다.

메이지의 쇠퇴기

메이지 45년(1912) 7월 30일, 천황이 만 59세로 서거하였다. 니쥬바시二重橋 앞에는 많은 시민이 모여 천황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매서운 세계정세 속에서 천황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새로운 일본을 구축하는 데 전력해온 정신적 지주를 잃었기 때문이다. 천황을 신으로 추대하여 신격화하려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원호가 새로 정해져 다이쇼 원년(1912)이 된 9월 13일 밤, 아오야마靑山 장례식장에서는 천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대는 다이쇼, 쇼와로 흘러갔다. 도쿄는 일본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더욱더 번영하게 된다.
1923년의 간토대지진으로 도쿄는 한순간에 잔해더미의 거리로 변했고, 1945년의 대공습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도쿄는 이전보다 한층 더 번영해왔다.
‘내리는 눈과 메이지는 멀어져간다.’
현대의 도쿄는 틀림없이 에도, 그리고 메이지에서 연속되어 있다.
지난날의 기억과 향수의 도시로서는 멀어져갔다. 그러나 ‘국가의 도시’와 ‘시민의 거리’라는 두 개의 얼굴은 지금의 도쿄도 모두 가지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1. 문명개화
메이지시대가 시작되다/ 문명개화의 소리가 나다/ 외국인이 왔다/ 서양 나가야 벽돌거리/ 소고기를 먹지 않으면 촌뜨기/ 거리에 차가 달리다

2. 새 나라 만들기
정부가 만든 새 공장/ 가이운바시의 천수루/ 징병징역 한 글자 차이/ 관원 폴리스의 메기수염/ 서생, 서생이라고 업신여기지 마라/ 첫 기적소리 신바시/ 우표에 소인

3. 도시의 시설
철도마차는 시민의 발/ 시계대의 종이 울리다/ 박람회, 성황을 이루다/ 이슬람풍의 박물관/ 램프에서 전등으로/
로쿠메이칸의 밤은 깊어라

4. 언론의 시대
사족의 상법/ 지유토를 먹이고 싶다/ 새 시대의 매스컴/ 니시키에에서 사진으로/ 국회의원 제멋대로 날뛰다

5. 도시만들기
소화에서 소방으로/ 들쑤시는 시구개정/ 파리를 능가하는 도시계획/ 베니스를 능가하는 물의 도시/
위신을 건 일본은행/ 변함없는 물 부족/ 화창한 봄날의 스미다가와

6. 시민의 생활
드디어 태어난 도쿄시/ 아사쿠사 스카이타워/ 제국호텔과 니콜라이 대성당/ 야마노테의 생활/ 도쿄 장사왕래/
나가야 생활/ 햇볕이 들지 않는 동네/ 전염병과의 싸움/ 매연 뿜는 포병공창

7. 도시의 즐거움
도쿄 12개월/ 연극구경/ 노래는 세상만사에 따라/ 메이지의 아이돌, 무스메 기다유/ 서커스와 마술/
화류계 여성들/ 유곽주위를 둘러싼 도랑에 등불이 흔들거린다/ 메이지의 명물 권공장/ 메이지의 아이들/
따르릉 따르릉하며 달리는 자전거/ 놀라지 마시라, 세금 2백만 엔/ 활동대사진?축음기/ 야구?보트?스모

8. 메이지의 쇠퇴기
우에노는 북쪽 관문/ 미쓰비시가하라의 잇쵸 런던/ 자동차의 대중화 시작/ 히비야 방화사건/ 메이지의 기념물, 동궁어소/ 오늘은 제국, 내일은 미쓰코시/ 비행기 하늘을 날다/ 메이지는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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