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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충록 (기생충의 흥망성쇠로 본 한국 근현대사)
구충록 (기생충의 흥망성쇠로 본 한국 근현대사)
저자 : 정준호
출판사 : 후마니타스
출판년 : 2023
ISBN : 9788964374313

책소개

코로나와의 싸움과 판박이,
50년 전에도 이 땅에 있었다

한때 전 국토가 회충 알로 뒤덮여 있고,
전 국민이 기생충 한 마리쯤은 가지고 있던 이 땅에서
사반세기 만에 기생충을 박멸하고
지금은 제3세계 기생충 관리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 보건 의료사의 빛나는 장면.
기생충 박멸사를
기생충 박사 정준호가 들려준다.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전국 단위 검진 및 투약 사업으로
누적 연인원 3억 명 이상, 연간 1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1970~90년대 전반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틀림없이 구충의 추억(기생충, 채변봉투, 구충제……) 혹은
망신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많던 기생충은 어디로 갔을까?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한국 사람들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
영조 37년(1761년)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가 회충을 토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人龍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 조선시대 왕의 몸은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존귀한 존재였지만, 그런 몸에도 회충은 존재했다. 회충 감염에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칠 무렵 인구의 90% 이상, 한 종류 이상의 기생충에 감염된 사례들까지 고려하면 100% 이상의 사람들이 기생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생충 한 마리쯤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인분을 비료로 농사를 짓던 과거에는 비료에 섞인 기생충 알이 땅에 뿌려지고, 그렇게 재배된 채소를 먹어 기생충에 감염되고 몸 안에서 자란 기생충의 알이 대변으로 다시 배출되는 순환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966년 「경항신문」 기사는 기생충박멸협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회충만으로 1년에 약 2천 명이 죽고 12지장충에 빨리는 피가 매일 560드럼, 연간 약 116억8천만㏄”에 달하며, 이로 인한 노동 생산 능률의 감소가 돈으로 해마다 약 480억 원이 된다고 했으며, 모 인사는 “한국 사람들은 기생충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49쪽).
2011년, 서울 시내를 발굴하던 중 조선시대 사대문 안의 토양 시료에서 기생충 알이 다량 확인되었다. 기생충 알은 개천 바닥이나 골목 배수구뿐만 아니라, 육조거리(현 세종로)나 종묘 광장 등 예부터 번화하고 개방된 곳까지 다수 관찰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미 토양에 다량의 기생충 감염 위험이 누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생충 박멸: 한국 보건 의료사의 빛나는 한 장면
1969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전국 단위 검진 및 투약 사업으로 누적 연인원 3억 명 이상, 연간 1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1970~90년대 전반까지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생충, 채변 봉투, 구충제에 대한 경험담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기생충 감염은 회충 0.03%, 구충 0%, 편충 0.41%로 거의 사라졌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번성한 공생체였던 기생충이 불과 사반세기 만에 사라진 것은 생태학적으로도 놀라운 변화이자 한국 보건 의료사의 빛나는 한 장면이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생충의 흥망성쇠를 통한 한국 근현대사’라는 특별하고 흥미로운 책을 소개한다.

필수적인 존재에서 수치스러운 존재로
한때 이 땅의 사람들은 (예컨대) 회충을 인간의 생존과 기능에 필수적인 요소, 즉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1950~60년대를 지나면서 기생충에 대한 인식은 수치스러운 존재이자 박멸의 대상으로 전환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환자들을 수술할 때 양동이를 옆에 두고 기생충을 꺼내 던져두어야 했던 상황,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주둔하던 “미8군에서는 채소를 우리 시장에서 사지 않고 항공편을 이용해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곤 했던 일들뿐 아니라, 1963년 병원 문 앞에 버려진 8세 여아의 배 속에서 1063마리, 4킬로에 달하는 회충을 꺼냈지만 여아는 사망하고 말았던 충격적인 사건,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 가운데 다수가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2차 파병이 중지되었던 일 등은 당시에 대내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기생충 박멸 사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정서를 감염에 대한 ‘수치심’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을 자극하는 전략은 질병 관리에 매우 효율적이었고 이후 결핵, 간염 등 다른 질병에 대한 대응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했던 과정을 돌아봐도, 감염자에게 수치심을 갖게 하는 전략이 얼마나 활용되기 쉬운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전략이 혐오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일이다.)

국경을 넘는 기생충과 사람들
이 책은, 애초에 식민지 경영을 위해 열대 의학 내지 기생충 관리에 관심을 쏟았던 일본에서, 한국과 타이완으로 기술과 자원이 이동하고, 네트워크가 형성되며, 다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저자는 기생충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을 통해 한국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산되는 네트워크가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런 연결 고리에서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의학과 과학기술 자체뿐 아니라 이를 실천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여러 기록물에서 쉽게 눈에 띄는 저명한 기생충학자나 협회 회장들이 아닌 말단에서, 마을 곳곳에서 실제 사업을 수행했던 직원들과 조력자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해방 후 한국의 개발독재 체제에서 대중 동원의 특징을 갖는 1960~80년대의 보건 의료 사업들은 상당 부분 정책적 차원이나 그 정책 결정자들을 주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생충 박멸 사업이 보여 주듯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사업을 수행해 온 일선의 사람들과 그에 수반된 다양한 암묵지와 행정적 지식들이었다.”

병원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장면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우리는 사회와 질병이 얼마나 긴밀한 상호작용을 맺고 있는지를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스크를 쓰고 모임을 줄이는 일상적인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심화시켰고, 국경 봉쇄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의 위기는 경제 불황으로 이어졌다. 백신을 개발해야 했고, 국가 관리하에 집단 검진과 집단 접종을 했다.
기생충 박멸 운동 시기, 한국 사회는 인분 비료를 화학 비료로 교체했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수세식 화장실로 바꾸었으며, 1년에 두 번씩 전체 학생이 집단 검진, 집단 구충을 실시했고, 매년 구충제를 복용했다. 그 결과 기생충이 사라졌지만, 사람은 못 넘는 휴전선을 넘어 북한의 말라리아가 다시 내려오거나 탈북 병사의 몸에서 기생충이 발견되는 등 끝나도 끝나지 않은 기생충의 근현대사를 흥미롭게 펼쳐진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들어가며 그 많던 기생충은 어디로 갔을까? 7

1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기생충 13
2 인룡에서 수치로: 기생충을 보다 25
3 “대변을 마치 황금처럼 생각하며”: 아시아적 기생충 관리 사업의 형성 63
4 기생충 길들이기: 제주도 사상충 한일 공동 연구 사업, 1970~72년 161
5 구충 기술의 국산화: 프라지콴텔과 간흡충 207
6 기생충에게는 국경이 없다 237

나가며 모든 것은 기생충에서 시작되었다 261

연표 267
주요 인물 269
참고 자료 273
미주 276
찾아보기 301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