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본문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저자 : 한홍구
출판사 : 한겨레출판
출판년 : 2014
ISBN : 9788984317796

책소개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가 전하는 한국현대사 유신체제의 탄생과 몰락!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유신』. 《한겨레》 토요판에 1년 반 동안 연재한 ‘유신과 오늘’을 묶어 낸 것으로, 전작 《대한민국사》,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등을 통해 역사의 현재적 의미를 밝힌 한국 현대사학자이자 현재사학자 한홍구가 유신 시대의 부활을 염려하며 썼다고 한다.

오늘날 박정희 정권을 기억하는 세대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산업화를 이끈 영웅 혹은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가 그것이다. 이 책은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박정희 집권 18년 중 후반 9년을 동안 벌어진 일들을 통해 유신시대가 탄생한 배경, 붕괴해가는 모습, 박정희가 어떻게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 위에 군림했으며 민주주의를 파괴해 갔는지에 집중하여 살펴본다.

1부 헌정의 파괴에서는 비상계엄의 부조리함을 밝히고, 2부 헌법 위의 사람에서는 법과 인권,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시대의 사건들을 소개한다. 3부 금기, 저항, 상처에서는 당시의 민초들의 삶을 조명하고, 4부 유신 사회사에서는 1970년대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5부 유신체제의 붕괴는 YH사건부터 10.26사태를 다룬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2014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 유신!
《대한민국史》의 한홍구가 파헤치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때 그 시절 이야기


한국 현대사의 고전 《대한민국史》의 저자 한홍구 교수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시절을 집중 조명한 《유신》을 펴냈다.
김대중의 돌풍과 신민당의 약진으로 박정희 장기집권에 대한 위협이 커진 1971년의 대선과 총선에서부터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죽음까지, 나아가 이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전두환의 내란과 1980년 5월 광주까지를 한 교수 특유의 입담과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번 책은 《한겨레》 토요판에 인기리 연재되었던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하였다. 총 5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는 1970년대 초반의 상황을 중심으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된 배경을, 2부는 1970년대에 벌어진 각종 사건(김대중 납치 사건,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장준하 의문사, 육영수 피격 사건 등)을 통해 어처구니없는 독재의 그늘을 살펴본다. 3부는 유신시대 저항의 흐름을 조명한다. 특히 산업화의 역군이자 민주화의 밀알이었으나 그간 조명 받지 못한 여공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하고 있다. 4부에서는 병영국가화, 베트남전 파병, 새마을운동, 강남 개발,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 등 1970년대의 사회사를 펼쳐 보인다. 5부는 YH 사건에서부터 10ㆍ26까지 유신체제 몰락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지나간 역사로서의 유신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신체제를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지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더욱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질 것이다.

- 책속으로 이어서 -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_116쪽

20세기 후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구진영 일각에서는 ‘산업화 세력’이란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면서 민주화도 산업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들기도 한다. 과연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누가 이룬 것일까.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_165쪽

사람들 사이에〈동아일보〉보는 맛으로 산다는 말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74년 12월 16일부터 몇몇 회사가〈동아일보〉로부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가기 시작했다. 당시〈동아일보〉의 광고 효과는 매우 컸기 때문에 광고를 한번 실으려면 현금을 주고도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런〈동아일보〉에서 광고주들이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를 취소하고 동판을 회수해간 것이다.〈동아일보〉는 처음에는 예약된 광고를 앞당겨 싣거나〈신동아〉,〈여성동아〉같은 자매지의 책 광고를 실으며 버텼지만, 광고의 98퍼센트가 해약되자 12월 26일 광고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영향력과 발행 부수에서 단연 1위를 자랑하던 신문에서 광고가 사라진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광고탄압으로 자유언론의 목을 죄려 했지만, 정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12월 28일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제목의 의견광고를 실은 것을 시작으로 독자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중앙정보부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고,〈동아일보〉구성원들로서는 “차마 받기에 가슴 아픈, 정말 가슴 아픈 성금과 격려광고”에 목이 메었다. _226쪽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했던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_272쪽

1979년 10월 18일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부산에 18일 자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하도 ‘비상사태다’, ‘긴급조치다’, ‘위수령이다’ 등 특별조치를 남발했지만, ‘비상계엄’이란 말에는 각별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지난여름 YH 사건이 터진 뒤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고, 2주일 전인 10월 4일에는 급기야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정국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은 참으로 느닷없었다. 7년 전 10월 17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꼭 7년 후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종막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틀 전인 10월 16일 부산대학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또한 비상계엄을 불러온 이 시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올 나비의 날갯짓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바로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었다. _383~384쪽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 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_412쪽

유신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니었다. 유신시대는 군대에서 1년에 근 1,500명이 죽던 시대였다. (…) 유신 전체로 치면 1개 사단이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멸한 것이다. 아니, 전쟁 없이 죽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 둘째, 유신시대는 박정희 한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였다. (…) 박정희는 유세 다니고 토론하는 것 하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다. 그 시절 박정희는 천황과도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꿈꿨다. 셋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가 끔찍하게 유린당한 시대였다. ‘유신독재 타도하자’나 ‘유신헌법 철폐하라’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청원)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때려버리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 넷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된 시대였다. 친일파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좌익이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 프락치로, 좌익 프락치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한 박정희는 전향하지 않는 좌익수들의 꼴을 봐주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살았어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계속 옥살이를 시켰다. 형기를 마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다시 잡아들여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기약없는 옥살이를 시켰다. _439~440쪽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추천사 고은(시인)
여는 글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저자 서문

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제1부 헌정의 파괴
1 유신 전야, 1971년의 대한민국
2 친위 쿠데타의 준비, 풍년사업
3 박정희와 일본 - 유신의 정신적 뿌리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1 국회 안의 꼭두각시, 유정회
2 윤필용 사건
3 김대중 납치 사건
4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5 인혁당 재건위 사건
6 대통령 저격 미수와 육영수 여사의 죽음
7 장준하 의문사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 금기의 시대와 청년문화
2 여공애사
3 동일방직 노동조합 인분 사건
4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5 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6 기자들의 각성, 자유언론실천선언
7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8 ‘무등산 타잔’의 비극

제4부 유신의 사회사
1 조국 ‘군대화’의 그늘
2 베트남 파병이 남긴 것
3 기지촌 정화운동
4 유신의 다른 이름, 새마을운동
5 통일벼와 식량증산정책
6 원자력발전과 핵무기 개발 사이
7 강남공화국의 탄생
8 중학교 입시 폐지와 고교 평준화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 10ㆍ26의 서곡, YH 사건
2 남민전 사건
3 김형욱의 실종과 죽음
4 부마항쟁, 불길이 치솟다
5 1979.10.26. 운명의 날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부록1 -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공개장
부록2 - 신유신의 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