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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삼재 (동경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의 삶과 선택)
동경삼재 (동경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의 삶과 선택)
저자 : 류시현
출판사 : 산처럼
출판년 : 2016
ISBN : 9788990062710

책소개

당대 지성계를 대표하는 동경의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그들의 삶과 선택을 조명하면서 한 시대를 읽는다

한말에 조선인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기대가 컸다. 실제로 이들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습득한 근대 지식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후세대 청년과 소년들에게 출판 및 저술 활동을 통해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들 동경 유학생 가운데 크게 주목받았던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동경삼재(東京三才)’라고 불렀다. 홍명희는 1888년, 최남선은 1890년, 이광수는 1892년에 태어났으며 각각 두 살 터울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이들은 한말 일제 초 ‘아시아의 런던’이라고 불리던 동경에 유학하면서 서로 활발히 교류했다. 동경에서도 이들은 학교 및 서점·도서관 등에서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적 노선 차이 때문에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 동경삼재는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빼곤 식민지의 지배 정책 변화와 해방과 분단의 시대 상황에서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해방과 분단 전후 동경삼재의 삶의 궤적은 한말 일제강점기란 시대를 선도했던 우리 지식인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들 세 사람의 삶과 선택을 조명하면서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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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당대 지성계를 대표하는

동경의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그들의 삶과 선택을 조명하면서 한 시대를 읽는다

한말에 조선인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기대가 컸다. 실제로 이들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습득한 근대 지식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후세대 청년과 소년들에게 출판 및 저술 활동을 통해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들 동경 유학생 가운데 크게 주목받았던 유학생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동경삼재(東京三才)’라고 불렀다. 홍명희는 1888년, 최남선은 1890년, 이광수는 1892년에 태어났으며 각각 두 살 터울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이들은 한말 일제 초 ‘아시아의 런던’이라고 불리던 동경에 유학하면서 서로 활발히 교류했다. 동경에서도 이들은 학교 및 서점·도서관 등에서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각자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적 노선 차이 때문에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 동경삼재는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빼곤 식민지의 지배 정책 변화와 해방과 분단의 시대 상황에서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해방과 분단 전후 동경삼재의 삶의 궤적은 한말 일제강점기란 시대를 선도했던 우리 지식인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들 세 사람의 삶과 선택을 조명하면서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 시대를 읽는다.



이 책의 특징은

* 영화 <동주> 이후, 이 책에서 그려내는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통해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생들의 고뇌와 분투를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세 사람 사이의 교류에 초점을 맞춰 그들의 삶을 소개하면서 한 시대의 지성사를 그려낼 뿐만 아니라,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자료 도판들을 여럿 싣고 있으며, 이들 삶을 일목요연하게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동경삼재와 그의 시대 연표’를 책 말미에 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제1부 동경삼재의 만남 홍명희(1888), 최남선(1890), 이광수(1892)는 각각 두 살 터울로 1876년 개항이 있은 지 15년을 전후해서 태어났다. 전통과 근대가 혼재되어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각각 양반, 중인, 몰락 양반(평민) 등으로 출신이 달랐다. 그래서 전통시대였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이들의 교류는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었다. 제1부에서는 이들 세 사람의 어린 시절 각기 달랐던 집안 분위기부터 한문 공부를 비롯한 학문 수련 과정이나, 독서 목록, 근대적 교육기관의 입문, 외국어 습득, 그리고 일본 유학 생활과 그로 인한 민족주의의 자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세 사람은 1904∼1905년 사이의 러일전쟁을 전후로 각각 동경에 유학을 가며 그곳에서 근대적 학문을 수용하고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활발히 교류한다.



제2부 동경삼재와 민족 동경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동경삼재는 식민지 현실에서 민족주의를 혹독하게 체험한다. 그리고 일본과 대비되는 헐벗은 조선에서 이들은 동포를 계몽할 계획을 세운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어, 최남선은 신문관을 세우고 《소년》을 발간하는 등 출판과 인쇄문화에 힘쓰면서 청년들에게 신문명을 소개했다. 홍명희도 1910년 졸업 시험도 치르지 않고 귀국하여 중국 지역의 민족운동가와 교류하면서 움직였다. 이후 동경삼재는 1910년 강제 병합의 충격으로 신경쇠약 등 정신적인 동요를 겪었다. 이광수와 홍명희는 방랑을 떠났다가 상해에서 만나 한 이불을 덮고 생활하기도 한다. 이광수는 이후 다시 동경 와세다대학에 제2차 유학을 가고, 홍명희는 해외에서 방랑을 계속하다 귀국한다. 1917년 《무정》으로 이광수는 조선 문단의 대표 주자가 되고, 사회 계몽에 관한 글을 계속 쓰며 교육 보급과 사회 개량을 역설하지만 홍명희는 글을 쓰거나 심정을 피력하지 않았다. 3·1운동에 이들 동경삼재는 적극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동경에서 20대 후반의 ‘늙은 유학생’이었던 이광수는 조선 지식인 청년의 대표로서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쓴 뒤 바로 상해로 탈출했으며, 최남선은 민족의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오랜 해외의 방랑 끝에 고향 괴산에 거주하던 홍명희는 3월 19일 충청북도 지역에서 최초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제3부 동경삼재와 이념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동경삼재는 감옥에 갇히거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광수는 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고 상해로 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기관지 《독립신문》의 책임자로 활동한다. 홍명희와 최남선은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홍명희가 1920년 4월 28일 출감하고 최남선이 1921년 10월 가출옥한다. 최남선은 감옥에서 조선의 근본을 고민하다 태양을 숭배하는 문화권에 관한 논의인 ‘?’의 원리를 찾았다고 하며, 이를 기점으로 계몽주의자에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로 활동한다. 홍명희는 출옥 후 교육과 언론에서 활동한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초반부터 위축이 되고, 국내에서는 조선 지식인에 대한 회유 정책으로 문화통치가 펼쳐지는 가운데 이광수는 귀국을 하고, 최남선은 잡지 《동명》을 발행하며, 홍명희는 사회주의사상 단체에 참여한다. 이후 동경삼재는 당대 사회주의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한 민족운동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홍명희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길을 걷고, 이광수와 홍명희는 민족주의 계열의 입장을 고수한다. 1920년 중후반 민족주의 좌우파로 나뉘어 이루어진 사회적 활동에 비례해서 이들 동경삼재 사이는 서로 더욱 멀어진다. 이광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일원으로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에서의 ‘자치’를 주장하고, 최남선은 단군과 불함문화론 연구를 통해 일본인 학자의 조선 연구에 학문적으로 대결하려고 했으나 정치적 입장이 탈각된 이런 연구는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에 참여하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한 ‘식민사관’을 옹호하게 된다.

1931년 국내 최대 합법적인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1930년대 정치운동의 대안으로 조선학 운동이 대두되는데, 이러한 조선적인 것에 관한 문화 학술 운동은 1928년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전》에 그 연원을 둔다. 한편 이광수와 최남선은 조선 민족 단위의 고민에서 벗어나 심지어 일본 중심의 문화권 논의에서 조선 문화를 하나의 지역 단위로 축소시키거나 조선 문화의 일본화를 주장한다.



제4부 동경삼재의 선택 1930년대 중반에 홍명희는 《임꺽정전》 집필에 몰두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쓰면서도 암중모색했으며, 최남선과 이광수는 민족 독립의 전망이 사라지자 당대 현실을 외면하고 회고적 경향에 입각해 일제와 타협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였다. 이광수는 ‘동우회 사건’으로 친일로 돌아선다. 동우회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국내 지부로 독립 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1937년 이광수를 포함한 41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가 보석으로 출석한다. 이때 이광수는 전향을 한다. 최남선은 1930년대 중후반부터 만주와 관련을 맺고 《만선일보》 고문과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가 된다. 반면 홍명희는 이 둘과는 달리 침묵하면서 지조를 지켰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최남선과 이광수는 창씨개병, 학병 동원 등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적극 지지한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홍명희는 좌우의 분열을 막아 하나가 된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했고, 이광수와 최남선은 일제 말 친일 행위로 실추된 문화적 권위를 해방 공간 안에서 복원하려고 했다. 1948년 반민특위가 조직되면서 최남선과 이광수는 체포됐다가 반민특위 활동이 주춤한 사이 무혐의 처분을 받는다. 홍명희는 1948년 북으로 갔다. 그 후 1948년 북한의 부수상에 올랐고 과학원 원장을 지내고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됐으며, 1968년 81세로 사망했다. 이광수는 6·25전쟁 때 건강이 안 좋아 피난을 못 갔다가 납북된 뒤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59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최남선은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일을 했고, 휴전 후 서울에서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았으며, 육군대학에서 한국사 강의를 했다. 1955년 뇌일혈로 병석에 누웠다가 1957년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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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책을 내면서



머리말 : 한국현대사와 동경삼재



제1부 동경삼재의 만남

전통과 근대의 충돌 : 어린 시절

작은 출발, 큰 간극 : 신학문 수련

근대 학문의 세례 : 일본 유학과 입학

‘동양의 런던’인 동경 : 첫 만남

민족의 발견 : 일본 유학 생활



제2부 동경삼재와 민족

장밋빛 전망 : 귀국과 계몽운동 참여

신경쇠약과 방랑 : 강제 ‘병합’ 전후

문명에 대한 압도 : 식민지인의 삶

민족의 기대 : 1910년대 신문화운동 참여

시대의 주인공 : 2·8 독립선언과 3·1운동 참가



제3부 동경삼재와 이념

새로운 각성 : 감옥 생활과 중국 망명

민족의 재발견 : 1920년대 전반기 국내 활동

개조론과 조선 문화 연구 : 조선적 정체성 탐구

민족운동의 새 방안 : 사회주의의 소개와 수용

갈림길 : 민족운동 노선의 분화와 신간회 활동

정치 운동의 대안 : 1930년대 조선학 운동 참가



제4부 동경삼재의 선택

전쟁의 조짐 : 만주사변과 민족 공간의 확대

전쟁의 확산 : 중일전쟁과 지조와 변절 사이

전쟁의 광기 : 태평양전쟁과 학병 독려 활동

독립의 기쁨과 불안 : 해방 공간과 좌우 분열

또 다른 선택 : 분단국가 수립과 6·25 전쟁



참고문헌

동경삼재와 그의 시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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